"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4~7)
당회장 이재록 목사
보통 오래 참는다고 하면 많은 시간 동안 지루하게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랑함으로 오래 참는 것은 결코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상대를 위해 오래 참는 것도 즐겁고, 기다림의 세월이 길었던 만큼 그동안 느낀 그리움과 아픔이 오히려 더욱 진한 사랑으로 승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래 참음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사랑
사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곧 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입니다. 영적인 사랑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변치 않으며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참된 사랑입니다. 반대로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며 변질되는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는 영적인 사랑에 대한 정의가 15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사랑의 정의에 얼마나 합당하게 행하는지를 정확히 측정하십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랑을 이룬 정도를 1%에서 100%까지 나눈다면 100%가 돼야 온전한 하나님 사랑의 차원에 이르렀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1% 지키면 1%만큼, 50% 지키면 50%만큼 영적인 사랑이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은총도 다르며 권능 또한 다르게 나타납니다(요 14:21).
2. 영적인 사랑의 기초가 되는 오래 참음
사랑의 정의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100% 이루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래 참음이 부족해 10%만 이루고 더 이상 진전이 없다면 그 이상의 차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10%를 이뤘다면 10%만큼 하나님 앞에 사랑과 은총을 입고, 나머지 90%는 원수 마귀 어둠에 속한 것입니다.
오래 참음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참음과 영적인 참음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참음이란 화가 날 일이 생겼을 때 억지로 화를 누르며 참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참음은 악 속에서 참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적인 참음 곧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이 같은 참음이 아닙니다. 선으로 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이 전혀 없으시므로 참을 일이 없으시지만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오래 참으신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선과 진리 가운데 참고 참아서 악을 빼내 버리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가 되므로 참을 일이 없어지지요.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사랑하기에 참는다라는 말 자체가 필요없는 참음입니다.
3. 사도 바울을 통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오래 참음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며 옥에 가두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섰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훼방한 그가 주님을 만난 후로는 어떻게 변화됐습니까?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하며 동족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 그가 얼마나 하나님 사랑에 가깝게 이르렀는지 알 수 있지요. 이러한 사랑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오래 참으심으로 사도 바울을 기대하며 기다리셨을까요? 주님께 부름받기 전, 사도 바울 역시 외적으로는 매우 훌륭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질 정도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교법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고 자라나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율법적인 자기 의는 하나님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많은 연단의 시간을 통해 자기 의와 지식이 깨어진 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바울을 택해 모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고 하나님 뜻을 이뤄 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권능을 받아 큰 일들을 이뤄 가면서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통해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었기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모든 연단을 인내로써 이겨 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얼마나 하나님 마음에 맞춰 갈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됐는지 알 수 있지요.
4.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고린도전서 13장 7절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소망 중에 모든 것을 믿으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돼 오래 참을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도 오래 참음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내가 사랑을 베푸는데도 돌을 던지는 사람에 대해, 또한 내게 오는 시련과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에 대해 오래 참는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 7절의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 나와 있는 진리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 다시 말해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온유하지 못한 것, 투기하는 것, 교만한 것, 무례히 행하는 것,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 성내는 것,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 불의를 기뻐하는 것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참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그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처럼 믿음 안에 소망을 이루고 소망 안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므로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모든 것을 믿는 것이 사랑일까요? 예를 들어, 부부간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 존중해 줍니다. 설령 의심할 만한 경우가 있더라도 먼저 선으로 바라보며 믿어 주려 하지요. 믿음 자체가 곧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상대방이 비록 부족할지라도 그의 모든 것을 믿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며, 사랑으로 상대를 믿어 줄 때 또한 모든 것을 바랄 수 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처럼 영적인 사랑으로 바라봐 줄 때 상대방이 더욱 힘을 내어 달려갈 수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오래 참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뤄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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