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단순히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영적 살인'도 금하시는 말씀이지요.
만일 이런 영적인 의미를 모르면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으니까 계명은 지키고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경우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이 매우 중한 범죄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자살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에 대한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라 고 해서 자신이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따라서 자살은 살인죄에 해당하며, 낙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아라 할지라도 부모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살인 자체도 무서운 죄인데, 더구나 부모가 자녀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2. 형제를 미워하는 경우
요한일서 3장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했지요. 단지 마음으로 미워할 뿐인데 살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죄악이 근본적으로 미움이라는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점점 발전하면 행함으로도 상대에게 악을 행하고 결국 살인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인류 최초로 살인죄를 범한 가인도 그 죄의 뿌리는 미움이었지요.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으시자 아벨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해 결국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욕하고 다투거나 시기하고 질투하며, 판단하고 정죄하여 상대의 허물을 전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거짓으로 속여 손해를 입히기도 하고 원수를 맺음으로 상종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이처럼 미움으로 인해 악을 행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영적으로 살인이라는 말씀입니다(마 5:21~22).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에 스스로 마음에 할례해 성결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우리 마음에 성령이 오셨고 마음에 있는 죄성까지 버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지요. 그러니 행함으로 살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미움이라는 죄의 뿌리까지 마음에서 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서 죄악들을 벗어 버리고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나갈 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3. 영혼을 실족시키는 경우
실족(失足)이란 '발을 잘못 디딘다'는 뜻으로, 신앙 안에서 누군가를 실족시킨다는 것은 상대를 진리에서 벗어나게 해 그 영혼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 중요한 일이 집안에 있는데 예배에 빠져도 될까요?" 하는 질문을 받고 머리된 일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주일을 어겨도 어쩔 수 없지요." 하고 대답했다면 이는 상대를 사망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니 영적인 살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개인적으로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교회 재정을 잠깐 쓰고 채워 넣어도 될까요?" 하는 질문에 "다시 채워 넣기만 하면 상관없지요."라고 말한다면 이 또한 하나님 뜻을 정반대로 가르치므로 상대를 실족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진리를 가르쳐 주므로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영적인 살인에 해당됩니다. 때로는 잘못된 신앙상담을 해 주어서 성도의 형편을 어렵게 하고 연단받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결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바른 상담을 해 줄 자신이 없다면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 하고 기도해서 정확한 주관을 받든지, 혹은 답을 알 만한 분에게 질문해서라도 정확한 답을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악한 말로 남의 허물을 판단 정죄하고 사단의 회를 만들어 수군수군하거나 이간질하는 것 등도 영적인 살인에 해당됩니다. 이로 인해 형제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악을 행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주의 종이나 교회에 대해 비방하는 말을 전해 많은 사람을 실족시켰다면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계수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악으로 인해 스스로 실족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로만 행하셨지만 악한 유대인들이나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자신의 악으로 실족했지요. 혹여 상대의 허물을 보고 "저 사람 때문에 교회 안 나가겠다." 한다면 이는 상대가 실족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으로 인한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비진리를 행했다고 해서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컨대, 상대를 믿고 보증을 서 주었는데 그로 인해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이지요. 이는 자신의 믿음이 참믿음이 아니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에는 '보증을 서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교회에서도 믿음의 형제간에는 금전 거래를 하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진리로 분별하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치 않으므로 피해를 입었으니 오히려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보고 판단 정죄해 실족했다면 그는 자신의 악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실족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녕 선한 마음이요, 참 믿음이 있다면 혹여 상대의 부족한 모습을 보아도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기도해 줄 뿐이지요.
또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 말씀에 걸림이 되므로 실족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해야 축복받는다는 말씀을 증거하면 교회에서 물질을 강조한다며 불편해하고 실족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권능을 말하면 육신의 생각으로 인해 믿지 못하므로 스스로 마음에 걸림이 돼 실족하기도 하지요. 자기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선한 마음이 있다면 증거되는 말씀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을 텐데(마 11:6), 자신이 어둠 가운데 거하므로 빛이신 하나님 말씀에 걸림이 되는 것입니다(요 11:10).
이렇게 사람이 실족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연약하고 마음에 악이 있기 때문이지만 형제를 실족시키는 사람 편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리 말씀도 상대의 믿음의 분량에 맞추어 지혜롭게 전해야 합니다. 갓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술 담배를 끊으세요." 한다거나 "주일에는 절대로 가게를 열면 안 됩니다."라고 가르친다면 이는 마치 젖먹이 아기에게 고기를 먹인 것과 같습니다. 억지로 순종한다고 해도 마음에 짐이 되거나 교회에 나오는 것을 포기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정녕 주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한다면 말 한 마디를 해도 삼가 절제하므로 상대를 실족시키지 않고 오히려 은혜와 덕을 끼칩니다. 상대에게 짐이 되고 찔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주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되도록 가르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대를 사랑하면 어떤 티도 허물도 보이지 않습니다. 혹여 큰 허물을 발견한다 해도 오히려 상대를 긍휼히 여기며 변화될 것을 바라봄으로 힘을 줄 수 있습니다. 미움을 철저히 버리고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 천국 새 예루살렘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 가운데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