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4, 5)

당회장 이 재 록 목사
성탄절이 되면 세상 사람도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하며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정작 왜 기쁘고 즐거운 날인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성탄의 의미는 모른 채 단지 기뻐하며 즐깁니다.
아무리 교회에 나가고 주님을 믿는다 고백하며 성탄의 기쁨을 누린다 해도 그 의미를 모른다면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탄생의 영적 의미를 되새겨봄으로써 진정한 성탄의 기쁨을 누리며 주님을 더욱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1. 짐승의 우리에서 나고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호화로운 궁전이나 적어도 안락한 집 안에서 태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짐승과 같은 인생을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도서 3:18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했습니다. 왜 인생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살아있는 영, 곧 생령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형상에 따라 흠과 티가 없는 거룩한 모습으로 지으셨지요. 그런데 아담이 불순종해 죄가 들어옴으로써 영이 죽고 맙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도 없었지요. 대신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을 받으니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악에 물들어갔습니다. 하나님 형상을 잃고 사람의 본분을 잃은 채, 짐승과 다름없는 모습이 되었지요.
하나님 말씀처럼 짐승과 다름없는 인생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짐승과 같은 인생을 대속하기 위해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누가복음 2:7에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했지요. 예수님을 구유에 뉘였다는 것은 짐승과 다름없는 사람들의 양식이 되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양식이란 ‘영생을 얻는 양식’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6:51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셨지요.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먹고 양식 삼는 것이 주님의 살, 곧 산 떡을 먹는 것입니다. 산 떡을 먹는 자만이 영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인생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낮고 천한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을 내주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2. 가난하게 되심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난까지도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을 가난하게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9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사람 아담을 전혀 부족함이 없는 풍요 속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 죄가 들어온 뒤로는 달라졌지요. 가난과 배고픔의 고통도 겪었습니다. 가난 자체가 죄악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속의 피를 흘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난도 아담의 범죄로 인한 저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대신 가난하게 사심으로써 대속해 주셨지요.
따라서 우리는 부요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정도를 걷는다면 축복받아 부요해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3. 채찍에 맞으심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 벌거벗긴 채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채찍 끝에는 납덩이가 달려 있어 때릴 때마다 몸을 휘감으며 살점을 파냈지요. 이사야서 53:5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했습니다. ‘나을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나았다’고 했지요. 베드로전서 2:24에도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합니다.
질병이나 연약함이 치료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는 그 원인이 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한 중풍병자가 침상에 누운 채로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며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요. 이때, 그의 질병은 치료됩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뒤 그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지금은 질병이 치료됐다 해도 또다시 죄를 지으면 더 심한 질병이 생길 수 있음을 경고해 주신 말씀이지요. 바로 이러한 말씀에서 질병의 원인이 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22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따라서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려주심도 질병의 원인이 되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마음으로 믿을 때,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으며 어떠한 질병이라도 치료됩니다.
4. 가시 면류관을 쓰심은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 면류관의 가시는 매우 길고 단단했습니다. 이 가시 면류관을 머리보다 작게 만들어서 억지로 눌러 씌우면 가시가 머리를 파고들어 살이 찢기고 박히지요.
예수님께서 이러한 고통을 당하며 피 흘리심은 생각으로 짓는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머리의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시기, 질투, 미움, 판단, 정죄, 간음 등 생각 속에서 갖가지 죄를 짓고 삽니다. ‘어떻게 생각 속에서까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받은 하나님 자녀는 생각 속의 죄까지도 버려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 행함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설령, 머리로는 나쁜 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을 행함으로만 옮기지 않으면 괜찮았지요. 그러나 하나님 자녀의 마음에 성령이 내주한 뒤부터는 생각으로 품는 것도 죄가 됩니다.
마태복음 5:28에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했지요. 요한일서 3:15에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있는 죄성이 생각을 통해 나오는 것도 죄가 됩니다.
그러면 혹여 ‘마음에 아직 죄성이 있어도 생각만 안하면 되는 것인가’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죄성이 남은 이상 육신의 생각으로 나오기 때문에 마음에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악을 버리기까지에는 이런 저런 육신의 생각 가운데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죄까지 사해 주시려고 대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려 주신 것입니다.
5. 양 손과 발에 못 박히심은
마가복음 9:43, 45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불구자가 되더라도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손발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품은 죄를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은 손과 발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고 취하며 죄를 짓지요.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손과 발로 짓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 양 손과 발에 못 박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이유가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진정 믿는다면 죄와 싸워 그것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같은 믿음의 행함이 있는 사람이 “예수님 탄생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백할 때에 주님의 참된 기쁨과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달음으로써 매일 성탄의 기쁨이 넘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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