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 8:1-11)
당회장 이재록 목사
많은 사람이 생명 다해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며 결국 썩어지고 변질되는 사랑입니다. 영원히 변함없는 진정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으며, 그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무한합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셨고, 성령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진정한 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말씀을 통해 진정한 사랑이 여러분 마음에 깊은 감동으로 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용서와 긍휼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인을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하고 묻지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히 여겨 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주위에 둘러싼 사람들의 죄목을 땅에 쓰신 후,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말씀하셨지요.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그들의 죄목을 쓰십니다. 처음에 미움, 혈기, 욕심, 도적질, 간음, 교만 등 일반적인 죄목들을 쓰실 때는 그 죄목들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쓰실 때는 사람들의 낯빛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범죄 한 정황을 언제, 어디서, 어떤 죄를 지었는지 구체적으로 쓰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바닥에 적히는 것을 보면서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양심에 가책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말씀하십니다.
물론 죄인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한다고 해서 모두가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으로 대해 주어도 고마운 줄 모르고 악을 행하는 뻔뻔한 사람들도 있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 ‘상대할 가치가 없다’며 외면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중심에서 긍휼히 여기셨고 생명을 내어주는 한이 있어도 영혼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도 끝까지 사랑하며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려 주셨지요. 우리도 이처럼 영혼을 살리기 위해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상대에게 큰 은혜를 입었을 때나 상대의 사랑을 확인했을 때는 누구나 뜨거운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좋은 때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도 변함이 없는 사랑이지요. 이러한 사랑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로 인해 어떤 고난이나 불이익을 당한다 해도 변개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연단을 받을 때도 하나님께 서운해 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헌신하고 충성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해도 그 사랑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심한 매를 맞고 피 흘리며 감옥에 갇혔을 때나, 험한 바다에서 하루 낮과 밤을 표류할 때도 중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내가 하나님 뜻에 따라 충성했는데 왜 매를 맞고 부끄러움을 당해야 하나, 왜 나를 이렇게 바다에 빠지게 하시나’ 하는 서운한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감히 나 같은 죄인이 귀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 받을 수 있구나’ 하며 감격스러워했지요.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마음이 뜨거우면 생명도 드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평생 드리고 드렸는데 또다시 전부를 드려야 한다면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을까요? 물질도, 충성도, 건강도 드리고 드렸는데 또다시 드려야 한다면, 그래도 행복하게 드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드렸는데도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낮은 자리에 처해진다 해도 서운함이나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이처럼 변함없는 사랑을 이룬다면,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마음을 헤아려 행하는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면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상대 입장과 마음이 되어 그가 원하는 것을 주며, 그렇지 않다 해도 서운해 하거나 오해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상대의 마음을 얻고자 할 때에는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기뻐하는지 세밀하게 살핍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는 더욱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 뜻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구원의 섭리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뜻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사명이라 해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하루하루를 편히 지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셨는지 깊이 헤아리셨기 때문에 쉬지 못하고 먹지 못한다 해도, 한 영혼이라도 더 치료하고 가르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실 때도 “아버지 사랑합니다. 내가 아프고 힘들지만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하고 고백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부모 마음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고난을 통해 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것을 고백하며 아버지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 하셨지요. “아버지여 내 안에 넘치는 아버지 사랑으로 이 모든 고난을 능히 감당할 수 있나이다 애통하지 마시고 눈물을 거두소서.”하면서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하셨습니다.
이렇게 장성한 자녀와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면 사명 한 가지를 감당할 때에도 그 모습과 열매가 달라집니다. 일을 이루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이루는 과정과 결과 모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이루기 위해 진액을 다 쏟게 되지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행하기 원한다면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선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하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베푸신 진정한 사랑을 상고하며 ‘나는 얼마나 진정한 사랑을 이루었는가?’자신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용서와 긍휼이 끝이 없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으며, 상대의 깊은 마음까지 헤아리는 진정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 기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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